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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16. <부정공>학생공휘우석묘갈명(學生公諱禹錫墓碣銘)
1. 문헌 목록 〉20. 20世 〉18. <부정공>학생공휘창원묘갈명(學生公諱昌源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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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부정공>이기헌공휘창석묘갈명(二既軒公諱昌錫墓碣銘)
二既軒公諱昌錫墓碣銘 周禮六行孝友居先苟能行此二者則其餘可推而知豈非君子人歟二旣軒趙公隱居于湖南平生不衒于世故世遂不知其賢此於公無捐益然不有以紀之何以徵於後乎公諱昌錫字舜擧淳昌人也鼻祖諱璋高麗檢校侍中再傳至玉川府院君忠獻公諱元吉與圃牧同德扶宗社策勳旣而致仕歸老于淳昌梓鄕鄕人慕之享武夷院是生副正諱瑜號虔谷不應我朝徵命自淳昌徙順天之富有鄕後朝家旌其忠而士林祭于社其後相好亭諱智崙梅窓處士諱大成皆以名流稱曾祖諱仁福祖諱禮淳考諱在益妣南原梁氏德惠之女公以 純祖甲申正月十日生卒于 高宗辛丑六月十八日壽七十七葬于所居村後水多谷坤坐之原配海州吳氏其考永眞後公一年而生十六年而歿墓在書堂村右麻田洞庚坐之原擧二男三女長泳泰娶順興安氏濟學女無育而夭次泳薰娶濟州梁軍斗煥女再娶慶州鄭氏仕圭女女適星州李敎成順興安益燮竹山安中煥泳薰六男三女長曰炳植系泳泰后其次曰允植曰亨植曰元植曰載植女適慶州鄭永碩豊川盧仲鉉長興任俊模曰淵守未娶李敎成無育安益燮四男在晦在鑄在哲在均安中煥二男三女男圭立圭源女適幸州奇雲度長興任圭錫濟州梁斗承餘不盡錄公幼有異質不類凡兒及長頎幹疎眉姿相淸癯修行以孝友爲本年十四丁內艱從禮如成人先公性嚴峻若家人有過畢呵責不少饒有時對案不食公怡聲愉色從傍起敬期於霽威乃己十年侍湯暫不離側食飮寒燠之節必躬檢不委於人丁卯丁外憂時公己衰耗而執制猶嚴不飮酒不食肉朔望哭墓三年如一日値喪餘尤致誠敬以至省牲滌器烹飪等事莫不親莅及其祭也哀痛如初終時觀者亦淚與伯氏監役公自幼至老共枕被同財帛同堂之內無間言嘗有感於常棣詩旣具旣翕之語以名其軒敎子女心以義方嫁娶不取當豪而擇勤儉禮法家爲之少輩有衣服不衷者必責之曰此招禍之源也踣家之本也平居侵晨而起受家人朝然後使之各執其業喪配後人多勸卜姓而終不許曰家有孀婦不其捐我體面乎盖公早喪長子故也治産業綜核無繊毫遺而曾不吝情於施與丙子大歉貧族窮交之所全活甚衆尤勤於先事祭田墓舍象設之未遑者皆此第經紀之嘗乘月運碣于書堂洞先壠之下時値洹寒壯者皆瑟縮而公時年己七十五率家少往莅曰事係爲先且役村丁可安坐乎其誠力之老不衰如此與人交淡然如水愈久而愈親若文士則待之倍敬至於藏獲之賤淫勝盖於威盖公天資純正無一毫飾邊待人處事寧失於厚而不立崖岸之行而所謂君子人者非耶顧隱約不能一世僅爲政於家而止是可惜也公之子泳薰而公隧道無顯刻乞銘於余余雖非其人不忍孤其誠遂爲之銘曰名門胚胎篤生賢人寬厚正直天資超倫念厥先世有勳有忠公實擩染緊守家風六行咸備五福兼全高臥雲林素志益堅不知不慍爲善孜孜凡今之世如公者誰水多之谷楸梧鬱蒼大書貞珉賢人之藏 楊州 趙秉瑜 撰 이기헌공휘창석묘갈명(二既軒公諱昌錫墓碣銘) 「주례(周禮)」에 보면 여섯 가지 행실이 있는데 효(孝)와 우(友)가 맨 처음이다. 이 두 가지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머지 행동이야 미루어 알 수 있으므로 군자다운 사람이라 하겠다. 이 기헌(二既軒) 조공(趙公)은 호남(湖南)지방에 살면서 한평생 자기를 세상에 내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의 훌륭함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공에게 아무런 흠이 되지는 않지만 기록하여 해두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지고 뒷날 증거를 삼을 것인가? 공의 휘(諱)는 창석(昌錫)이며 자(字)는 순거(舜擧)이다 순창(淳昌)이 본관으로 시조는 휘(諱) 장(璋)으로 고려 검교시중(檢校侍中)이었고 두번 전하여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 충헌공(忠獻公) 휘(諱) 원길(元吉)은 포은(圃隱)·목은(牧隱)과 덕망을 같이하여 쓰러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으려 함으로써 책훈(策勳)을 받았다. 기여코 벼슬길에서 물러나 순창(淳昌) 고향으로 돌아와 늘그막을 보내니 고을 사람들이 경모하여 무이서원(武夷書院)에 모셨다. 이분이 부정(副正)을 낳았는데 휘는 유(瑜) 호는 건곡(虔谷)이다. 조선조의 징명(徵命)에 따르지 않고 순창에서 순천 부유향(富有鄕:승주를 말함)으로 옮겨가 지냈다 하여 훗날 나라에서는 그의 충성에 대한 정려를 내려주었고, 사림들도 사우(祠宇)에 다 모셔 제사를 지냈다. 그뒤 상호정(相好亭) 휘 지륜(智崙) 매창처사(梅窓處士) 휘 대성(大成)은 모두 명성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증조의 휘는 인복(仁福)이며 조의 휘는 예순(禮淳)이며 고(考)의 휘는 재익(在益)이며 비(地)는 남원 양씨(南原梁氏) 덕혜(德惠)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純祖) 갑신(一八二四)년 정월 十일에 태어나 고종(高宗) 신축(一九○一)년 六월 十八일에 세상을 뜨니 七十七세였다. 그가 살던 마을 뒤 수다곡(水多谷) 곤좌(坤坐)의 언덕에 장사 하였으며 부인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영진(永眞)의 따님으로 공보다 一년 뒤 태어나서 공보다 十六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서당촌(書堂村) 오른편 마전동(麻田洞) 경좌(庚坐) 언덕에 있다. 二남 三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영태(泳泰)이다. 그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인 제학(濟學)의 딸에게 장가 들었으나 자식을 두지 못하고 일찍 죽었으며 둘째 영훈(泳薰)은 제주 양씨(齊州梁氏)로서 참군(參軍)벼슬을 지낸 두환(斗煥)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경주 정씨(慶州鄭氏)인 임규(任圭)의 딸을 두번째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딸들은 성주(星州)이 교성(李敎成) 순흥(順興) 안 익섭(安益燮) 죽산(竹山) 안 중환(安中煥)등에게 각각 시집갔다. 영훈(泳薰)은 六남 三녀를 두었다. 장남 병식(炳植)은 영태(泳泰)의 양자가 되었고 그 다음은 윤식(允植)·형식(亨植)·원식(元植)·재식(載植)이며 딸들은 경주(慶州)정 영석(鄭永碩) 풍천(豊川) 노중현(盧仲鉉) 장흥(長興) 임준모(任俊模)에게 시집갔으며 막내 연수(淵守)는 아직 장가들지 않았다. 사위 이 교성(李敎成)은 자식이 없고 안 익섭(安益燮)은 재회(在晦)·재수(在鑄)·재철(在哲)·재군(在均) 四남을 두었고 안중환(安中煥)은 二남三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규립(圭立)·규원(圭源)이며 딸은 행주(幸州) 기 운도(奇雲度) 장흥(長興) 임 규석(任圭錫) 제주(濟州) 양 두승(梁斗承)등에게 시집갔다. 그 밖에도 많지만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어릴때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어 평범한 아이들 같지 않았고 장성함에 따라 키도 훤칠해지고 눈썹도 듬성하여 품위가 있어 보였다. 수행(修行)하는데 있어 효(孝)와 우(友)로 바탕을 삼았는데 十四세가 되어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예절을 따라 행동 하는 게 마치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의 선친(先親)은 성격이 엄하셔서 집안에 누가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호되게 나무라시고 조금도 용서치 않았으며 때로는 한동안 음식을 대하지 않을 경우도 있었는데 이럴 때면 공은 공손한 태도로 그 곁에서 성의를 다하여 그 노여움을 기어이 풀어드렸고, 十년동안 시탕(侍湯)을 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음식이나 춥고 더움의 주위살핌을 반드시 자기가 하고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정묘(丁卯)년에 부친의 상을 다하였다. 그당시 공은 벌써 노쇠하였지만 예의 절차를 오히려 더 엄하게 하여 술이나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초하루 보름에 묘도에 찾아가 살피기 三년 동안 하루도 어김이 없었다. 상은 다 치루고 나서도 더욱 정성을 쏟아 성생(省牲:제사상에 오르는 육류를 살핌) 척기(滌器:제기를 씻는 일) 팽임(烹飪:제사 음식을 익힘)등의 일까지도 몸소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제사때면 애통해 하기를 마치 처음 상 당할 때처럼 하니 줄곧 지켜보던 사람도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그의 형 감역공(監役公)과는 어릴 때부터 늘그막까지 잠자리도 함께하고 재산도 같이 하였지만 온 집안이 화목하여 아무 군소리가 없었다. 일찌기 상체시(常棣詩:「시경」 소아에 있는 시로 형제간에 우애를 읊었음)에 있는 기구기흡(既具既翕)이란 말에 감동을 받아 그 시의 글자를 따다가 거처의 이름을 짓기도 하였고 자녀들은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지도하였다. 시집 장가 보낼 때도 부유한 집과는 하지 않고 검소 하면서도 예법을 제대로 지키는 집안을 가려 하였으며 의복 투정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호되게 꾸짖으며, 『그런 버릇은 화(禍)를 불러 들이는 근원이 되며 집안을 망칠 근본이다.』 라고 하였다. 평소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집안 식구들의 문안을 받고나서 제각기 자기 임무에 임하도록 하였다. 부인을 잃고난 뒤 많은 사람들이 재취(再娶) 하기를 권했지만 끝내 거부하며, 『집안에 과부 며느리가 있는데 나만 부인을 맞아오면 내 체면을 깎는 일이 아니냐?』라고 했는데 이 말은 공이 일찌기 큰 아들을 잃었음을 의미한 듯 싶다. 집안 살림을 할 때는 곡식 한 알이라도 모아 함부로 버리는 일이 없었지만 남을 도와 줄 때는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병자(丙子)년 대 흉년에도 친족이나 벗들 가운데 그의 도움으로 궁핍한 생활을 그런데로 꾸려갈 수 있었던 사람이 여간 많았다. 선조(先祖)를 위하는 일에 더욱 근면하여 제전(祭田)이나 묘사(墓舍)를 미처 마련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차근 차근 마련했다. 언젠가 서당동(書堂洞) 선룡(先壠) 아래에다 묘갈(墓竭)을 세우기 위해 비를 운반할 때였다. 때마침 추운 겨울이어서 일하던 젊은이들이 오돌오돌 떨었다. 그때 공은 七十五세의 고령 이었지만 집안 아이들을 데리고 그 곳에 가면서, 『이 일이 선조를 위하는 일이며, 또 마을 사람들을 시키고 있는데 편히 앉아만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의 정성은 늙어서도 쇠약해지지 않았다. 남과 사귈 때도 아무 꾸밈이 없이 담담하여 오래가면 갈수록 더욱 친하게 지냈고 선비들과 사귈 때는 배나 더 공공 하였으며 미천한 하인에게도 위엄보다는 은혜로움을 주었는데 이 모두가 공의 천품이 순수하여 조금도 꾸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을 대하거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차라리 너무 후한 잘못을 받았으면 받았지 남과 화합되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런데도 군자다운 사람이 아니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공의 이런 규약(規約)으로 한시대를 교화시키지 못하고 겨우 가정을 이끌어 가는데 그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수 없다. 공의 아들 영훈(泳薰)이 공의 묘소에 비문이 없다 하여 나에게 와서 명(銘)을 청한다. 내가 비록 그럴 만한 사람이 못되지만 차마 그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 이렇게 명(銘)을 쓰게 되었다. 명문의 씨가 되어 名門胚胎 훌륭한 분 나셨네 篤生賢人 관후하고 정직한 이 분 寬厚正直 천품도 뛰어 나셨네 天資超倫 생각 해보면 그의 선세엔 念厥先世 공로자도 충신도 있었다네 有勳有忠 공이 실로 그 영향을 받아 왔기에 公實擩染 가풍을 굳세게 지킨 거라오 緊守家風 육행도 다 갖추고 六行咸備 오복도 온전하게 五福兼全 자고 이는 운림속에 高臥雲林 옛 뜻이 더욱 굳네 素志益堅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낸 일도 없이 不知不慍 착한 일만 하여 왔네 爲善孜孜 요즘 같은 세상에 凡今之世 공만한 이 누가 있나 如公者誰 수다 골짜기에 水多之谷 노나무 오동나무 을창도 한데 楸梧鬱蒼 돌을 세워 크게 씻네 大書貞珉 훌륭한 분 잠들었노라고 賢人之藏 양주(楊州) 조병유(趙秉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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